영명축일10/5
성녀 테레사(Teresia, 또는 데레사)는 에스파냐 카스티야(Castilla)의 아빌라에서
신심 깊은 아버지 알론소 산체스 데 세페다(Alonso Sanchez de Cepeda)와
어머니 베아트리스 데 아우마다 이 쿠에바스(Beatriz de Ahumada y Cuevas)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고향에 있는 아우구스티누스회 수녀원이 운영하는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고,
19세 때에 아빌라의 강생 카르멜 수도원에 입회하였다.
오랫동안 수도생활을 갈망해오던 그녀는 1537년 11월에 수도서원을 했으나 지병으로 잠시 수녀원을 떠났다가 돌아오기도 했다.
20년 가까이 수도생활에 정진한 그녀는 극심한 고행으로 인해 몸이 쇠약해져 죽음의 문턱에까지 가기도 했으나,
40세에 이르러 내적 회심의 체험을 하게 되었다.
특히 그녀는 1554년 수난 받는 그리스도를 만나는 체험을 통해 내적 회심을 경험한 이후 여러 번 환시를 보고
신비스런 음성을 들었는데, 알칸타라(Alcantara)의 성 베드로(Petrus, 10월 19일) 신부의 영적 지도를 받을 때까지는
불안에 떨어야 했다.
성 베드로 신부는 그 모든 환시가 진실한 것임을 그녀에게 확신시켜 주었다.
격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그녀는 그 당시의 다소 느긋한 수도생활보다 카르멜회의 초기 규칙대로 보다
엄격한 수도 생활을 원하는 4명의 수녀들과 함께 '맨발의 카르멜회'(discalceati)를 시작하면서
아빌라에 성 요셉 수도원을 세웠다(1562년).
1567년 카르멜회의 총장인 루베오 신부는 성 요셉 수도원과 같이 엄격한 규칙을 따르는 다른 수도원을 세우도록
그녀에게 허락하였다.
메디노 델 캄포에 제2의 수도원을 세울 때 그녀는 십자가의 성 요한(Joannes a Cruce, 12월 14일)이란 젊은 수도자를 만났으며,
1568년에는 두루엘로에 남자를 위한 최초의 수도원을 세웠다.
이것이 최초의 맨발의 카르멜 남자 수도회였다.
성녀 테레사는 에스파냐 전역을 다니면서 카르멜 수도원의 개혁을 위해 노력했으나,
1575년의 총회에서는 그녀의 개혁 그룹을 제한하기도 했었다.
1580년까지 카르멜회 내부의 완화파와 개혁파 간의 투쟁은 격심하였다.
이윽고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Gregorius XIII)는 개혁을 추구하는 '맨발의 카르멜회'를 완화 카르멜회로부터 분리시켜
독립 수도회로 인정하게 되었다.
성녀 테레사는 수많은 편지와 책을 지었는데, 이 모두는 영성 문학의 고전이 되어 널리 읽혀지고 있다.
그 중에서 자서전인 "천주 자비의 글"(1562-1565년), "완덕의 길"(1565년), "영혼의 성"(1577년) 등이 특히 유명하다.
그리스도교 역사상 가장 돋보이는 신비가 중의 한 명인 성녀 테레사는 지적이고 빈틈없는 사람이었으며,
매력적이며 깊은 영성을 지녔다.
그녀는 차원 높은 관상생활과 더불어 수준 높은 활동생활을 성공적으로 조화시켰던 위대한 성녀이다.
그녀는 1582년 9월 말경 부르고스(Burgos)에서 아빌라로 가는 도중 알바 데 토르메스(Alba de Tormes) 수도원에 머물던 중
병세가 악화되어 10월 4일 선종하였다.
그녀는 1614년 교황 바오로 5세(Paulus V)에 의해 시복되었고, 1622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5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그리고 1970년에는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교회학자로 선포되었다.
그녀는 '예수의 성녀 테레사'로도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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